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명량 철쇄설 === 명량 철쇄설이란 조선 수군이 울돌목에 쇠사슬(철쇄)를 깔아서, 울돌목의 급류에 밀려 쇠사슬에 걸린 일본의 전선들이 대파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1971년에 상영된 영화 '성웅 이순신'에서 이미 철쇄를 사용한 것으로 그려졌으며, 1999년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방송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명되었다. 2005년에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철쇄...도 아닌 '''밧줄'''로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면서 조류가 바뀔 때까지 시간을 끈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2000년대 이래로 철쇄로 적선을 부수었다는 설 자체는 많이 수그러들었고, 대신 철쇄를 전투에 보조하는 형태로 사용하여 전투의 효율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들도 아래의 이유등으로 많이 반박되면서, 2010년대 후반부 이후로는 역사 연구 반영이 늦은 일반 대중매체에서도 철쇄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 '''기록된 근거는?''' * 김억추의 행적을 기록한 호남절의록(1799)과 현무공실기(1914)에 '충무공께서 공에게 철쇄를 설치하게 하셨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 철쇄를 설치하고 관리해야 하는 관할 실무자는 전라 우수사인 [[김억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여전히 문제가 되는 호남절의록과 현무공실기의 과장된 묘사[* 김억추가 검풍을 휘날리자 왜선 수백여 척이 침몰하였다던가, 화살 한 발로 적장을 잡고 세 발로 전열을 무너뜨렸다던가, 막내 동생 김응추가 10여 장을 뛰어올라 20여 급을 베었다던가.]와 함께 김억추의 이런 중요한 공적을 이순신이 기록하지 않은 점에서 의문스럽다. 오히려 김억추는 명량 해전 당시 가장 후방에서 전황을 관망하며 각을 재고 있었다고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친히 적어주셨다. 무엇보다 현무공실기는 1900년 물건으로 후손들이 쓴 행장류에다가 당대에서 한참 뒤에 쓰인 것이므로 신빙성이 낮다. *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었으므로 적어도 1795년 이전에 작성되었을 '해남현지'를 보면 '공이 철쇄로 물속을 가로질러 막았는데, 양변 바위 위에 철삭을 박은 자국이 지금도 완연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이충무공께서 철삭을 쳐서 왜군을 죽인 곳(李忠武設索殺倭處)이라 부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일단 해남 현지 자체는 당시 국가 관청이 남긴 실사 확인 기록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전히 구전에 의거하였고, 철쇄가 아니라 철삭(鐵索)이라 하고 있어 철쇄설을 방증하는 다른 자료들과 상충된다. 또한 당시의 1차 사료에는 어디에도 명량 해전의 철쇄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 영조 27년(1751)에 편찬된 [[택리지]]에도 '이순신이 쇠사슬을 뻗쳐놓고 기다리니 왜선 5백 척이 걸리고 물살에 휩쓸려 모두 가라앉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미 해전으로부터 150년이 지난 뒤의 사료인 것과, 왜선이 5백 척이라는 표현 등 정확도가 떨어져서 그대로 신빙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만들었다는 근거는?''' * 이전부터 조선 수군이 철쇄를 설치하여 항구를 봉쇄했던 사례가 왕왕 발견된다. 중종 실록 5년 5월 24일 4번째 기사를 보면 [[삼포왜란]] 이후 왜구의 습격을 막기 위해 '큰 나무를 박아 세우고 쇠사슬로 차례차례 연결하는데,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나무에 달아 그 나무를 물밑으로 한 자쯤 잠기게 하여 적선이 걸려 넘어오지 못하고 찍어서 끊지도 못하게 하며, 중간에 쇠갈고리를 설치하여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에 합치되는 나무들이 진해와 통영 등지에서 발굴되고는 하며, 이순신 또한 난중일기에 임진왜란에 앞서 철쇄 공사를 한 기록들을 남겼다.[* 1592년 1월 17일의 철쇄공석(鐵鎖孔石), 2월 2일의 철쇄횡설(鐵鎖橫設), 2월 9일의 철쇄관장목(鐵鎖貫長木), 3월 27일의 철쇄횡설. 사실 이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수군 수영들에는 철쇄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노하우가 명량 해전의 철쇄 제작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구를 봉쇄하는 철쇄와 명량을 가로지르는 철쇄는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섬 사이를 가로막아 배의 진입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 단순한 방어시설이었고, 그것도 전함이 정박할 소포 인근에 간략히 설치된 임시 구조물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명량에 설치되어야 할 철쇄는 시속 14 km에 달하는 급류에 말려든 배 수십 척 배을 저지해야 한다. 이외에도 오만가지 문제가 있어 현대 사학계에서는 설득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가설이다.(다만 당시 철이 부족하다는 것은 동철(구리)이고, 철은 풍부했다) 해남 우수영관광지의 기념관에서는 철쇄설을 소개하고 있다. 다만 사료라고 현무공실기를 제시한 것도 아니고 우수영 입구에 방어용 쇠사슬을 걸었다는 기사를 가져다가 명량해전 철쇄 사용의 근거라고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